새로운 질서 위키

무화한 세계: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

일반 독자가 책 한 권을 손에 쥐기까지 글로 이뤄진 콘텐츠는 대개 몇몇 단계마다 다른 타이포그래피와 함께한다. 콘텐츠는 일차적으로 저자의 타이포그래피 속에서 생산되고, 편집자의 타이포그래피 속에서 다듬어지거나 재생산된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인디자인(inDesign) 같은 조판 전문 소프트웨어상에서 모든 콘텐츠를 그러모으는 순간, 저자와 편집자의 타이포그래피는 무화하고, 동시에 콘텐츠는 글쓰기를 떠나 읽기의 차원에 자리 잡는다. 언젠가 가까운 작가들과 무화한 세계, 달리 말해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대표적인 워드프로세서인 아래아 한글을 사용하는 소설가 한유주는 기본으로 지정된 글자체인 ‘함초롬바탕체’를 질색한다고 공공연히 밝혀왔다. “함초롬바탕체로는 도무지 글을 쓸 수가 없어요. 굴림체나 산세리프 계열 글자체도 다르지 않고요. 몇 가지 단점이 있지만, 제 작업에 가장 적합한 글자체는 ‘한컴바탕’입니다. 아직까지는요.” 워드프로세서상에서 판형, 여백, 글자체 등을 출간될 책과 완전히 동일하게 설정한 뒤 글을 써본 소설가 정지돈은 이런 환경이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는 오히려 비효율적이었음을 고백했다. “도무지 어색해서 결국 원래 방식으로 돌아왔죠. 읽는 감각과 쓰는 감각을 동일화하려는 시도였는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둘은 엄연히 다르더라고요. 그 뒤 소설은 9포인트 크기의 ‘바탕’으로, 에세이는 10포인트 크기의 ‘맑은 고딕’으로 씁니다.” 시인 송승언 또한 다르지 않다. “작업할 때마다 틈틈이 워드프로세서나 글자체를 바꿔보는데, 작가는 결국 두 가지 타이포그래피와 마주하는 것 같아요.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와 읽기용 타이포그래피죠. 중요한 건 아무래도 전자고요.” 책 한 권을 만들어내는 일이 편집자와의 핑퐁 게임임을 경험한,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어떤 작가는 구상 단계부터 구글 문서(Google Docs)를 고집하기도 한다. “편집자와 원활하게 협업할 수만 있다면 사실 글자체는 상관없죠.” 저술가 겸 편집자 김뉘연 또한 구글 문서를 활용한다. “아이디어를 정리해 본격적으로 글을 쓸 때는 구글 독스를 이용합니다. 최근 만든 구글 문서 파일들을 열어보니 모두 에어리얼(Arial)로 작성돼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른 건 아니고, 구글 문서에서 새로운 문서를 만들면 자동으로 설정되는 글자체를 사용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혹시 글자체가 세리프 계열로 설정된 경우, 산세리프 계열로 바꿉니다.” 저술가 겸 큐레이터 윤율리는 어떨까. “데스크톱, 랩톱, 태블릿, 스마트폰을 넘나들며 글을 쓰는 편이에요. 기기가 전환될 때마다 글자체가 바뀌고요. 제 글은 적어도 네 가지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를 거치면서 완성됩니다.” 그래픽 디자이너 김형진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는 그냥 맥 OS의 기본 메모장을 사용합니다.” 저술가로서 그가 쓴 아름다운 글 또한 인디자인 밖의 산물인 셈이다.

이들의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가 다소 자의적이라면 이보다 엄격한 경우도 있다. 오래전부터 마크다운(Markdown)1으로 글을 쓰는 나는 마크다운 전문 워드프로세서인 ‘iA 라이터’(iA Writer)를 주로 사용한다. 이 소프트웨어는 사용자로 하여금 글자체나 글자 크기 등을 제어할 수 있는 자유를 얼마간 박탈하는 대신 최적의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 환경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둔다. 글자를 둘러싼 넉넉한 공간 덕에 글자 하나하나가 도드라지고, 나는 글자로 치환된 생각을 즉각적으로 판독할 수 있다. 독서에 무리가 없는 선에서 지면을 낭비하지 않도록 글자 사이가 최소한으로 좁혀진 읽기용 타이포그래피가 아닌 소프트웨어에서 설정된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 환경에서 글을 쓰다 보면 콘텐츠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아닌 무엇을 말하는지에 집중해보라고 권하는 듯한 느낌마저 받는다. (그 덕일까? 이 글의 초안은 iA 라이터상에서 한 시간여 만에 작성됐다.)

나아가 코딩(coding)은 엄격함을 넘어 교조적이기까지 한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의 영역이다. 다루는 언어가 컴퓨터 언어라는 점, 즉 의사소통의 대상이 인간이 아닌 컴퓨터라는 점, 결과물이 일반적인 글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면 코딩은 글쓰기와 다르지 않다. 웹사이트나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 동안 내가 타자한 글자는 형태, 색, 위치를 부여받기도 한다. 코딩용 글자체는 코드의 판독성을 위해 종류와 무관하게 고정폭을 취한다. 특히, 파이선(Python), 해스켈(Haskell) 같은 컴퓨터 언어는 들여쓰기마저 주요한 문법으로 삼는다. 그밖에 코딩용 글자체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 몇 가지 더 있다. 예컨대 숫자 0, 알파벳 대문자 O, 소문자 o을 쉽게 변별할 수 있어야 한다. 숫자 1, 알파벳 대문자 I, 소문자 l, 특수 기호 |(수직선)뿐 아니라 코딩에서 자주 사용되는 세 가지 괄호((), {}, []), 콜론(:)과 세미콜론(;) 등도 마찬가지다. 코딩의 일차적인 목표는 컴퓨터와의 올바른 의사소통이고, 컴퓨터는 인간과 달리 오자나 탈자, 잘못된 띄어쓰기에 조금도 너그럽지 않다. 코드를 완전히 통제하지 않으면 맞닥뜨리는 것은 버그뿐이다. 10여 년 전 날개집 연구원 시절 안상수 선생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글자는 무섭다.”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프로그래머를 괴롭히려면 그가 쓴 코드에서 세미콜론(;)을 그리스 문자의 물음표(;)로 바꾸면 된다는 고약한 장난은 선생이 말한 글자의 무서움을 일깨운다. 물론 선생의 의도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글쓰기에서 코딩까지, 양상은 다르지만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는 대개 생산성, 효율성, 실용성을 향한다. 최종 결과물에 가까운, 다시 말해 모든 작업이 거의 마무리됐다고 주장하는 읽기용 타이포그래피와 달리 어딘가 느슨한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는 여전히 작업 중이라 말한다. 이 세계에서 글자체의 미려함은 조금 나중, 다시 말해 콘텐츠가 완성된 뒤의 문제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바는 글쓰기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타이포그래피의 힘이다. 나아가 타이포그래피 전문가 사이에서 단순히 아마추어리즘으로 여겨져온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의 어떤 가능성이다. 그렇다고 작가를 위한 글쓰기용 글자체를 고안해보려는 시도는 유의미함과 무관하게 결국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코딩을 제외한 글쓰기용 타이포그래피에서 많은 부분은 평균화하기 어려운 느낌의 영역이고, 그 느낌은 작가마다 제각각일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무화한 세계를 향한 관심은 필요하다고 믿는다.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글쓰기를 위해, 그에 따른 생산적인 콘텐츠를 위해, 또는 그저 재미 삼아.


  1. 2004년 미국의 블로거 존 그루버와 프로그래머 에런 스워츠가 고안한 글쓰기용 마크업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