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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파일을 만드는 어떤 방법

  1. 원서를 살핀다. 영국 쉬드 앤드 워드(Sheed & Ward)에서 1931년에 처음 펴낸 원서는 J. M. 덴트 앤드 손(J. M. Dent & Son), 리더스 유니언(Reader’s Union), 데이비드 R. 고딘(David R. Godine), 펭귄 북스(Penguin Books) 등을 거친 여러 판본이 있고, 저마다 내용과 표지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원서의 가장 큰 특징인 본문에 들여쓰기 대신 단락 기호(¶)를 사용한 것을 비롯해 고전적이며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매한가지다. 실무자가 일하는 회사에 있는 판본은 미국 데이비드 R. 고딘에서 1988년에 펴낸 것으로, 영국의 인쇄업자이자 지은이의 사촌인 크리스토퍼 스켈턴(Christopher Skelton)이 쓴 서문이 추가됐다. 해당 출판사 소속 디자이너인 듯한 리사 클라크(Lisa Clark)가 디자인한 표지는 초판본을 포함한 다른 판본보다 퍽 장식적으로 보이지만, 원서와 지은이의 명성에 홀린 실무자에게는 이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2. 가능성과 한계를 따져 업무 일정과 방식을 계획한다. 출판사에서 PDF(Portable Document Format) 파일을 만드는 일반적 과정은 거칠게 탁구 경기에 비유할 만하다. 대표 선수인 두 실무자(편집자, 디자이너)가 원고를 공 삼아 주고받고, 경우에 따라 지은이 또는 옮긴이, 주간 또는 편집장, 마케터 등이 임시 선수 또는 심판으로 참여한다. 이에 따라 각 실무자에게 역할에 맞는 업무 기간을 할당해 세부 일정을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업무에서는 실무자 한 명이 편집자와 디자이너를 겸하므로, 업무에 가장 치명적인 한계, 다시 말해 마감일 정도만 정하고, 세부 일정은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정하기로 한다. 같은 이유로, 본격적 업무에는 실무자에게 익숙한 소프트웨어인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나 한글과컴퓨터 아래아 한글 대신, 어도비 인디자인(Adobe InDesign)만 이용하기로 한다. 실무자는 워드나 아래아 한글에 내장된 (몇몇 오류가 있지만 업무에 분명 유용한) 자동 한국어 맞춤법 검사 기능을 이용할 수 없겠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인디자인에 같은 기능을 하는 플러그인을 탑재할 구체적 방법을 고민할지 모른다. 한편, 회사에서 정품 소프트웨어를 마련해주지 않더라도, 당황하기보다 회사 재정 상황을 고려하며 일단 시험판 소프트웨어를 이용한다.
  3. 자신이 만든 PDF 파일이 책이 된 모습을 상상해본다. 첫인상에서 손에 쥐었을 때의 무게와 부피감, 내지 구조와 분위기, 오프라인 서점에서 다른 책과 함께 있는 모습, 온라인 서점의 책 상세 정보 페이지, 독자 반응까지, 상상이 구체적일수록 이후 업무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이에 따라 한국어판에서도 원서의 분위기를 비슷하게나마 유지해보기로 한다.
  4. 옮긴이가 보내온 원고를 살핀다. 각 부분을 위계에 따라 합치거나 나누고, 실무자가 일하는 회사에서 마련한 저술 및 교정·교열 지침에 따라 문장의 어투, 외래어 표기, 원어 병기, 띄어쓰기와 붙여쓰기, 문장부호 등 원고의 형식과 관련한 원칙을 정하며, 업무 과정에서 이 원칙을 어기거나 바꿀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이어서 도판 가운데 누락되거나 해상도가 지나치게 낮은 것은 없는지 확인한다.
  5. 내지 템플레이트(template)를 만든다. 실무자는 디자인 부서 동료들이 2년 또는 4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을 학교에서 보내며 얻은 전문적 눈썰미와 업무 요령이 없다. 업무 기간에 이를 눈과 손에 익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느슨하게나마 이론과 수치, 독자로서의 경험, 친구들과 동료들의 조언에 기댄다. 또한 여전히 유용할 만한 디자인 안내서인 원서 자체를 참고 자료로 활용하며, 참고해야 할 것이 《레이 건(Ray Gun)》이 아닌 점에 안심한다. 이에 따라 글자 기준선 사잇값을 기준으로, 판형, 글 상자 너비와 길이, 글 상자 주위 여백, 책 각 부분에 들어갈 글자 크기 등 원고의 ‘또 다른’ 형식과 관련한 원칙을 정한다. 한편, 실무자가 일하는 회사에는 조판에 일명 ‘SM 글자체’와 이와 어울려 보이는 영문 글자체 몇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이용하는 암묵적 전통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를 따른다면, 실무자는 정확히 원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수치만큼 글자 사이 공간을 줄이거나, 다시 말해 자신의 비전문적 눈썰미를 따르거나, 업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손에 덜 익은 ‘합성 글꼴’이나 ‘GREP’ 등의 기능을 이용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폰트 편집 소프트웨어로 두어 가지 기존 폰트를 합쳐 전용 폰트를 만드는 방법은 실무자에게 ‘흑마술’에 가까울지 모른다. 따라서 “책 한 권에 여러 좋은 글자체를 함께 쓰기보다 한 가지 글자체만 엄격히 쓰는 게 좋다.”라는 지은이의 제안을 핑계 삼아, 전문적 눈썰미와 업무 요령 없이도 읽을 만한 결과물을 보여주는, 산돌 명조 네오(Neo) 1을 주된 글자체로 이용하되, 판권면, 단락 기호에서는 다른 글자체를 이용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6. 원고를 도판과 함께 인디자인으로 옮긴 뒤 다시 살핀다. 업무 기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과정은 대개 ‘읽기’와 ‘보기’를 동반한다. 이에 따라 애정 어린 독자인 체하며 원고에서 잘못된 정보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고, 경우에 따라 모호한 부분은 표시해 옮긴이에게 확인을 부탁한다. 옮긴이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면 손수 다시 쓴다. (다시 쓰는 부분이 늘어날수록 실무자에게는 편집자나 디자이너 대신, 지은이보다 못하고 옮긴이보다 나은 호칭이 필요해질지 모른다.) 동시에 앞서 정한 원고의 형식과 관련한 원칙에 따라 원고를 정리한다. 원고는 실무자가 일하는 회사에서 옮긴이에게 미리 전달한 저술 및 교정·교열 지침에 따라 쓰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과정은 적이 고통스럽고 지루할 수 있지만, 로봇 청소기인 체하거나 적절한 고통과 지루함이 업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고 믿으며 용기를 얻는다. 이밖에 원서에 없는 옮긴이와 실무자가 쓴 주(註)가 도판 및 도판 설명과 충돌하는 문제로, 해당 지면 아래에서 뒷부분으로 위치를 옮기는 대신 주 개수와 내용을 추가하고, 계획과 무관하게 업무 과정에서 생긴 실무자의 바람에 따라 원고의 모든 장(章)이 오른쪽 지면에서 시작해 왼쪽 지면에서 끝나도록 원고를 줄이거나 늘인다. 이 과정에서 어긋난 대수를 맞추기 위해 인터넷 자료를 참고해 쓴 지은이 연보와 사용자가 입력한 단어가 있는 부분의 쪽 번호를 자동으로 찾는 플러그인을 이용한 찾아보기를 추가한다. 한편, 출력한 종이에 한 실무자가 수정할 부분을 펜으로 표시하면, 다른 실무자가 그것을 보며 원본 파일을 하나하나 수정하고, 다시 처음 실무자가 제대로 수정했는지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수정 하나가 끝나는 기존의 업무 방식을 되돌아본다. 실무자가 이 방식을 비효율적이거나 원시적으로 느껴왔다면, 위지위그(WYSIWYG, what you see is what you get)를 몸소 경험하는 동안, 소프트웨어 발전 속도에 대응하는 조금 더 효율적이거나 덜 원시적인 방식을 가늠하거나 자신의 방식이 영국 하이픈 프레스(Hyphen Press) 발행인 로빈 킨로스(Robin Kinross)가 말하는 ‘편집 타이포그래피(editorial typography)’와 어떤 차이가 있을지 전보다 더 궁금해할지 모른다.
  7. 표지 템플레이트를 만든다. 표지와 내지는 서로를 참조해야 하므로, 표지 템플레이트는 내지 템플레이트 구조를 따른다. 동시에 표지는 내지를 온전히 보호하면서 무엇보다 어떤 방식으로든 독자를 매혹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 출판사에서 표지를 정하는 방법은 실무자가 준비한 몇 가지 표지 시안을 두고, 실무자를 포함한 각 부서 담당자, 특히 독자 취향과 시장 상황에 밝아 보이는 마케터가 참여하는 회의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실무자가 일하는 회사에서는 각 부서 담당자의 의견보다 주간 또는 편집장의 취향을 따르는 것이 더욱 일반적일지 모른다. 따라서 회의 자리에서 실무자는 자신이 선택한 지은이의 문장 몇 가지가 앞표지에 무작위로 들어가는 시안이나 길 산스 울트라 볼드(Gill Sans Ultra Bold) 소문자가 a에서 z까지 들어가 모두 스물여섯 가지 앞표지가 나오는 시안을 내세운다면, 웃음거리가 될지 모른다. 그 이유로 뚜렷한 논리 없이 “음…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몇 권씩 사서 실내 장식 소품으로도 활용하지 않을까요?” 따위의 주장을 한다면 더더욱. 결국 회의 결과에 수긍하며, 자신이 만든 PDF 파일이 책뿐 아니라 소비자에게 판매할 상품이 되는 사실을 실감한다.
  8. 지금까지의 업무 결과물을 옮긴이와 동료들에게 공유해 확인을 부탁한다. 옮긴이와 동료들이 독자 또는 로봇 청소기인 체하며 실무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류를 찾아내는 사이, 업무 초반에 세운 계획을 되돌아보며, 가격을 비롯해 내지와 표지에 사용할 종이 종류와 평량, 제본 방식, 별색 잉크 색 등 PDF 파일을 만든 뒤 필요한 사항을 정한다.
  9. 옮긴이와 동료들이 찾아낸 오류를 바로잡고, 인쇄소에서 안내한 PDF 파일 설정값을 참고해 ‘내보내기’ 버튼을 클릭한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띈, 기능을 알기 어려운 세부 PDF 파일 설정값을 포함해 인쇄형 PDF 파일과 대화형 PDF 파일의 차이에 관해 알아보는 것은 나중으로 미룬다. 이어서 자신이 만든 PDF 파일이 책이 된 모습을 다시 상상해본다. 첫인상에서 손에 쥐었을 때의 무게와 부피감, 내지 구조와 분위기, 오프라인 서점에서 다른 책과 함께 있는 모습, 온라인 서점의 책 상세 정보 페이지, 독자 반응까지, 상상이 구체적일수록 얼마간 기뻐하거나 오래 겸연쩍어한다. 회사에서 요구한 업무 일지를 쓰고, 회사 문을 나서기 전까지.